Gymnopedie No 3.
나는 널 이길 자신이 얼마든지 있었다. 칠칠치 못하다며, 물건을 챙겨주고, 약속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나타나도 넌 괜찮다 했다. 그래서 나는 네 우위에 있다 생각했다. 햇볕이 뜨거워 말 없이 잡고 있던 손을 풀어도, 너는 그러려니하며 자유로워진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약속이 있는 당일날 약속을 취소하고,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들켜도 너는 그러려니 뒤를 돌았다. 내가 너를 부르면 대답하고, 네가 나를 부를 땐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낮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네가 물었다.
"태민아, 나는 네가."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샤워를 마친 남자가 방을 나섰다. 연락하라며 손을 흔들기에 그저 웃었다. 네 한숨소리가 컸다. 거칠어진 피부와 지친 표정을 담은 눈망울을 마주하면서 나는 해맑게 웃었다.
"날 더 좋아하면 돼."
간단해. 우리 사이는 네가 날 좋아하는 이상, 끝나지 않아. 나보다 네가 더 사랑한다. 너는 나를 좋아한다. 잔인하지만 네게서 사랑을 확인한 후에는 언제나 마음이 가벼웠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 이상, 이 비정상적인 관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언제고 내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주고, 나를 기다려주고. 내가 흘려놓은 감정들을 정리할 것이다. 그것은 오롯이 네 몫이었다.
해가 그리 뜨겁지도 않은 아침이었으나, 우리는 손을 잡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잡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종인의 표정이 평소와 달라 눈치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도로에는 차가 시끄럽게 달렸고, 각자의 하루를 위해 뛰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는 남처럼 걸었다. 내가 이번에는 심했나? 마냥 가벼웠던 마음에 무게를 더했다.
"종인아."
"......"
"화 났어?"
불규칙한 도시의 소음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화 났어? 그래서, 네가 답하지 않는 것이다. 들은 체도 하지 않던 네 걸음이 빨라졌다. 멈춰 있는 나를 돌아 보지도 않던 그 뒷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 났나. 발걸음이 바빠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었다. 너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너는 나를...
...좋아하나?
연락이 오지 않은 채 일주일이나 지났다. 좋아하는게 아니었나. 너를 본 것은 그날의 뒷 모습이 마지막이 되었다. 애꿎은 핸드폰의 화면만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이 쯤이면 단문일지라도 문자가 와 있어야 될텐데, 일주일 내내 아무것도 않고 핸드폰만 들여봤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몇 번을 핸드폰을 쥐고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 종인아. 세 글자를 치면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다 적혀진 글자를 보면서도 한참을 전송버튼 위에서 망설였다. 끝내 보내지 못한 글자와, 울리지 않는 알림은 그 밤 내내 악몽에 시달리게 했다.
우리의 관계에 밤이 드리웠다. 기분이 축축 아래로 쳐졌다. 마른 입술에 생수로나마 숨을 불어넣었다. 장난을 치던 관계들은 어느새 소리 없이 정리되었다. 홀로 남았다. 밤이 길어 외로움도 깊었다.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애써 접어놓았던 생각을 펼쳐놓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우리는 끝이구나. 밤이 깊어만 갔다. 네 사랑이 없는 삶은 지독히도 외로워서 한참을 이불 속에서 웅크려야 했다.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익숙한 번호를 누른다. 길지 않은 신호음이 끝나고, 나는 네 이름을 불렀다. 종인아.
터져나오는 울음에 발음이 뭉개졌다. 며칠만의 대화였는데, 저번과 같아질까 무서워 다른 이야기를 생각했다. 밤이 오는 내내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너에게 하고싶은 말이 아주 많았는데. 속에서 목소리를 냈다. 울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겠지만 너는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너는 나를..
..좋아하나?
밤이 길었다. 한참을 전화기 너머의 너를 향해 울고, 고백했지만 네게서 답은 없었다. 통화가 끊어진 전화기를 붙잡고 무너졌다.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구나. 널 상처입힌 대가일까. 잠들지 못한 채 네게 전하고 싶었던 말들을 정리했다. 속으로 네 이름만 되뇌이며 밤을 보냈다.
며칠 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해가 떠올랐다. 열이 오른 건지, 눈가가 뻑뻑했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꿈을 꾸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아득한 기억 속에서 네가 나타났다. 이마를 짚는 손이 다정하다. 나를 좋아하는 네가 환상이 되어 나타난 것일까.
"종인아, 난 네가 좋아."
"날 좋아해줘."
헝클어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있다. 종인아, 나를 좋아해줘. 잠긴 목으로 애원했다. 응, 네가 답했다. 좋아해, 태민아.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전이다. 부러 답하지 않았으나, 너는 아무 말 없이 웃어주었다. 아, 다시 우리가 돌아왔구나. 괴로웠던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나를 쓰다듬는 네 손길이 유난히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