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쇼] 문이 열렸다
2015. 9. 9. 13:41고희든 - 하늘에서 세번째로 밝은 별
문이 열렸다. 미리 문제를 다 푼 녀석들은 한명씩 자리를 정리하고 시험장을 나갔다. 하나둘씩 제 짐을 챙겨 일어선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새까매진 시험지 에 별이 하나 더 늘었다. 애초에 몇 번이었는지도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검어진 문제를 풀기 위해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었다 폈다. ‘3? 4? 아, 모르겠다......’ 낙서의 점이 길어진다. 펜을 돌리다가 시계를 한 번 보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가 다시 의미 없는 낙서를 반복했다. 이제 가야지. 이제 진짜 가야지. 모르는 문제는 길게 쥐고 있어봤자 독이었다. 결국 눈에 띄는 숫자들을 골라 답안카드에 옮겼다. 다 채워진 답안카드를 보고서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설 수 있었다. 아, 이제 정말 끝이구나. 시험지와 답안카드를 제출하고, 짐을 챙겨 시험장을 나섰다. 손에 쥐고 있던 수험표를 가방 안으로 집어넣고 점퍼의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대학은 갈 수 있을까, 다른 녀석들은 잘 봤으려나,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그래서 마지막에 찍은 건 그게 맞을까. 눈 위로 걱정들을 하나씩 남겼다. 문득 느껴지는 감정이 생소하여, 교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미 해는 져서 모습을 감췄고, 시커멓게 물들어버린 하늘 위로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앳된 모습으로 입학을 해서 어린 너를 처음 만나고,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의 흉내를 내며 놀던 일, 해가 지도록 놀이터에서 흙집을 지었던 일,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량식품을 사먹으며 걸었던 너와 나는, 중학교를 들어가기 전 아쉽게도 안녕을 했고 연락을 하라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공부하다가도 아마 문득 서로를 떠올렸겠지. 너도 나처럼.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부담감이 느껴졌던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키가 훌쩍 커진 너를 만났다. 나는 밤늦게 도서관을 전전하며 시험을 준비했고, 너는 그 옆에서 잠을 자기 바빴고, 점심시간엔 너는 친구들과 공을 차고, 나는 스탠드에 앉아 다음 시간 시험을 준비하고,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부랴부랴 너는 단어를 외우고. 아주 작은 일상들이 지나간 시간들을 가득 채웠다. 아아, 그렇구나.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선명하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네 얼굴을 하늘 위로 그렸다. 눈을 깜박였다.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로 시작된 걱정들을 모아서 결국 네 얼굴을 그려냈다. 아아, 시험이 끝났다. 우리는 그 밤에 약속을 했다. 같은 대학을 가자고, 새끼손가락을 걸며,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젖어가는 여름 밤 그 어딘가를 같이 보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사박사박, 누군가가 밟지 않은 흰 눈 밭을 골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너는 시험을 잘 봤을까. 우리는, 우리는, 같은 대학을 갈 수 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고민하고 싶었던 것으로 다시금 생각을 정리했다. 날씨가 춥다. 주머니에 오래 넣고 있어 따뜻해진 손을 뺨 위로 올렸다. 이제 우리는 볼 수 있으려나.
‘나는, 우리 집 일을 이어야지.’
‘…아,’
‘쇼자에몽, 너는 대학교에 가겠지? 담임이 그랬어, 너는 명문대에 갈 거라고.’
‘응, 그래야지.’
너와, 같은 대학, 나는 그것을 꿈꾸며 달려왔는데. 간단하게 가업을 이어야한다고 말하는 네게 그날의 약속 같은 걸 꺼내 보이는 것은 무의미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그때의 나는 쓰게 웃으며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어색한 웃음으로. 그렇게 그 밤을 지워가며 우리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나에게 많은 대학교를 추천해줬고 나는 열심히 하던 공부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선생님들마다 내게 핀잔을 주는 날이 늘어갔고, 시험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너의 연락이 왔다. 시험을 잘 보라는 그 메세지를 보다가 달력을 보다가 다시 펜을 들었다. 이제 우리의 시간들은 끝이 날 텐데. 우리는 더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 섞인 낙서와 필기가 섞인 종이들을 내려 보았다. 우리는, 더 함께 할 수 있을까. 픽, 스탠드 등을 끄고 어둠 속에서 다시 펜을 쥐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폰을 켜자마자 가장 먼저 도착한 메시지는 란타로. 모두들 시험은 잘 봤냐는 물음이었다. 덧붙여진 수고했다는 목소리가 폰을 통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친구들의 메시지가 차례로 도착했고,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단조의 메시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단조에게 화가 난 이유조차 말하지 않았으나 단조는 언제나와 같이 왜 화를 내냐며 따져 묻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가 쌓아온 시간이었다. 결국, 나는 단조에게 전화를 했다. 시험은 잘 봤냐는 물음에 단조는 평소와 같이 대답했다. 그리고 ‘쇼자에몽, 너는 당연히 잘 봤겠지?’ 라며 이야기 한다. 어떤 문제가 헷갈려 몇 분을 쥐고 있어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저, 시험이 끝났으니. 바람을 쐬러 가자. 라고 했다. 우리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의 시간 덕분에.
단조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맥주를 가지고 왔다. 시험이 끝났으니 어른이란 말을 덧붙이며. 저 너머의 불빛들과 까만 하늘을 아래에 두고 첫 번째 맥주 캔을 땄다. 너는 이제 명문대를 가겠지? 단조가 물었다. 나는 한 모금을 마시며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너 정도면 명문대에 갈 수 있을거야. 넌 대단하니까.라며 덧붙이며 단조는 웃었다. 나는 대단하지 않아.하는 생각을 하며 말없이 웃어주었다. 너는 캔을 들어올린다. 서로의 캔이 부딪혔다. 너의 웃음이 시원하게 터졌다. 찬바람에 손이 시렸다. 나는 잠시 캔을 내려놓았다. 네 얼굴이 붉다. 찬 바람과, 까매진 하늘을 생각하다가 너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우리 집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하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기분 좋게 웃어보이던 녀석은 한숨에 맥주 한 캔을 비워냈다. 쇼자에몽, 별이 예쁘다. 어느 선을 기준으로 위에는 별, 밑에는 도시의 불빛. 너는 그 풍경의 어느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별이 예쁘다고 하는지, 불빛이 예쁘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나 역시 맥주를 한 모금을 삼키며 그렇다 대답해주었다. 너는 두 번째 캔을 들었다. 그리고 또 단숨에 들이킨다. 네 한숨이 조금 무거워졌다. 나는 시험을 망쳤어. 뭐, 예상했겠지만. 단조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입 안이 쓰다. 맥주를 또 한 모금 들이켰다. 너는 낮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너와 같은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겨울 밤, 그 어딘가를 같이 향하며. 너는 말했다. 또 한 번 너의 캔이 비워진다. 나 역시 한모금을 삼켰다.
쇼자에몽, 우리는 이제 어쩌지.
단조의 눈가가 붉었다. 이 녀석 취했나. 연락하면 되지. 나는 차분하게 너를 달랬다. 그러나 그 말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너는 또 새로운 캔을 들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자조적으로 웃는 단조의 모습에 나는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근데 쇼자에몽. 겨울 밤이 유독 조용한 탓일까. 네 목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근데 쇼자에몽.'
나는,
조용한 밤, 조용한 하늘, 조용한 도시, 그리고, 너는 조용하게 고백했다.
널 좋아해.
입 안이 쓰다. 더 마실 맥주가 없었다. 단조의 얼굴이 붉었다. 그리고 단조는 더 웃지 않았다. 다 먹은 맥주 캔을 구긴다. 캔이 구겨지는 소리가 선명하다. 나는 차마 정리되지 않아 너를 보지 못했다. 어떤 시선으로 널 마주해야할지 몰랐다. 어떤 대답으로 널, 너에게. 그것은 우리의 시간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어쩌지.
마음 위로 새카맣게 별을 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물음의 답을 알지 못했다. 모르겠어. 나는, 모르겠어. 결국 난 답을 해줄 수 없었다. 찬 손을 몇번이고 쥐었다 폈다. 발끝을 보았다가 바닥을 보았다가 네 발을 보았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난, 이만 들어가야겠다. 안녕, 연락할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조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난 그 내려앉은 단조의 뒷모습을 보다, 뒷걸음질을 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뛰듯이 걸으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너는 계속 홀로 있을까. 나처럼 그 자리를 피했을까. 나는 널 꽤 알고 있다 자신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단조의 물음을 곱씹었다.
그러게, 우리는 이제 어쩌지.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너와 연락이 안되면 어떡하지. 같은 대학도 아닌데 이대로 사이가 멀어지면 어떡하지. 내 시간 속에 너는 어떻게 해야하지. 모르는 답들이 쏟아졌다. 다시 눈이 내렸다. 내가 남겨놓은 발자국을 지운다. 나는 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도시의 빛을 등에 지고, 별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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