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이사] 현패러 조각
2015. 9. 9. 15:47변함없이 올곧은 사람이 있다.
나는 사람을 볼때 그와 어울리는 꽃을 떠올리고는 했다. 예를 들어, 같은 반의 케마는 겨울에 피어오르는 흰색의 수선화라던가, 교내에서 수재라 손꼽히는 센조는 그 고고한 모습에 각시붓꽃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유난히도 꽃이 떠오르지 않아 밤낮을 그 사람에게 어울릴법한 꽃을 생각하게 했다.
'아저씨는 꽃이 안 떠올라요.'
벚나무 아래에 서 있어도, 그는 벚꽃이 아니었다. 뻗은 손을 잡으니,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꽃이 아니라서 그래.'
그 말이 발목을 잡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잘도 웃는다. 불퉁해져 답했다. 꽃이 아닌 사람은 없어요. 나름 화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어린애 투정으로 넘기듯 그래, 그래. 하며 멈춘 내 걸음을 이끌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의 꽃을 찾겠다고. 덤덤하고 당연하게 뱉은 그 말을 훌쩍 뛰어넘어 그에게 어울리는 꽃을 찾겠다고. 머릿속으로 여러 꽃의 사진들을 넘겼고 그는 느려진 내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이렇게 허망하게 흘러갔다.
매번 그는 벚나무 밑에서 꽃잎을 맞으며 나를 기다렸고, 내가 나오면 물었다.
"찾았어?"
"아직이요."
얼굴을 울상으로 만들면 그는 미소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리하지는 말고. 꽃잎이 더 무수히 떨어지고, 분홍의 잎이 파랗게 물들때까지 나는 그의 꽃을 찾지 못하였다. 푸른 여름에 교복의 소매는 짧아졌으나 그는 여전히 까만 긴 옷을 입고 나를 기다렸다.
"안 더워요?"
"나는 이 정도에 안 더워"
검은 모자의 챙 밑으로 눈이 휘게 웃어준다. 햇살, 여름 햇살. 그 두눈에 봄을 담아주었고, 여름에는 여름의 햇살같이 웃어주었으며 겨울의 그는 또 겨울스러웠다. 사계절 내내 한결같은 그 미소에 꽃이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 그는 꽃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꽃 아닌가봐요."
"응."
웃음은 여전했다. 지워지지도, 바래지지도 않고 계절이 몇 번을 바뀌어도.
"나무인가봐요."
꽃이 아니라는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대답하는 그는 그래, 나무를 닮았다. 굳게 그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나무. 색색이 화려하지 않지만 그 푸르름으로 나를 살게하는.
아저씨, 소나무 같아요.
그가 여전히 웃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좋아요. 나는 사실 꽃보다 나무가 좋거든요. 햇살아래의 그를 떠올리며 걸었고 또 그는 아무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의 시간은 허망하게 흘러만 갔다.
계절을 또 넘겼다. 가을이다. 하늘은 높아졌고, 발에는 낙엽이 치였다. 변함없이 검은 옷을 입은 그가 나를 기다렸다. 뻗어있는 그의 손을 맞잡는다. 걸음을 멈췄다. 허망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안타까웠다.
"이제 나 얼마나 남았어요?"
"글쎄."
우리가 만난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그는 처음봤을 때부터 저 모습으로 물었었다. 마지막 소원이 있느냐구. 그래서 망설임없이 말했다.
병원복말구 교복입구 계절마다의 학교를 다니고 싶어요. 지금 저 낙엽들을 밟으며 등교해보고 싶기도 하고, 앙상한 나무가지 위로 쌓이는 흰눈을 보고 또 아무도 밟지않은 눈 위로 발자욱을 내보고도 싶고, 벚꽃잎이 내리는 그 계절엔 벚나무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과 하교해보고 싶고, 여름에는 팔이 짧은 하복을 입고 아이스크림 먹으면서도 하교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가을이 오면. 그 때 나를 데려가주세요.
욕심을 왕창 부려서 답했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고, 마지막이라면 그런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임없이 그 손을 잡았고, 그는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 했다.
그리고 오늘, 또 내일, 다가오는 그 날에도. 나는 그때도 망설임없이 그의 손을 잡을 것이다. 그늘 아래로 숨겨진 그의 눈을 마주했다.
"아저씨 오늘은 달을 보러가요."
"그래."
변함없이 내 앞에는 그가 있다. 우리는 평소와 달리 병원으로 향하지 않고, 날이 어둑해질정도로 걸어서 달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았다. 둥그런 달을 보다가 서로를 보다가 그의 모자를 손에 쥐고 마스크를 내리고, 그 눈을 맞추며 입을 맞췄다.
흘러가는 시간에 안타까움을 느낀적은 없었다. 세상에 있는 불운이 내게로 쏟아져서 그런가봐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에게 말했었다.
다른 사람이 슬퍼지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내가 떠나서 슬퍼해야할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떠나는 사람에 대한 슬픔을 주고싶지 않았거든요.
그의 손이 다정하게 머리위로 내려앉았다.
"내가 여기서 기다릴게."
그의 말은 마음 가득 달을 품어 벅차오르게 했다. 숨이 찼다.
"소나무처럼."
"…응."
"우리 또 보자, 그 때는 네 불운을 내가 짊어질게."
"……응."
굳은 어깨로 머리를 기댔다. 흐르는 시간이 안타까웠다. 그의 위로가 마음을 묶었다. "응." 그는 아무말 하지 않았으나, 나는 여러번 더 대답했다. 슬픔을 남기고 가서 죄송해요, 이기적이어서 죄송해요. 나를 위해, 슬퍼해, 주세요.
그의 손이 여전히 다정했다.
밤이 깊어갔다. 아마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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