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이사] 잔상, 어린날의 당신, 당신을 눈으로만 쫓고 있었어
2015. 9. 9. 16:05붕대를 감은 사내는 언제고 눈 앞에 나타났다.
분명 제 입으로는 바쁘다했으면서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앞에 나타나 한 쪽밖에 보이지 않는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밤이 오면 기척없이 나타난 사내는 동이 터오면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로 사라졌다. 그의 말마따나 나는 닌자답지 않았고,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누구보다 닌자다웠다.
그에게는 흔적이 남지 않았다.
붕대를 쌓아 앞도 보이지 않던 와중에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감아놓은 붕대는 제 멋대로 흩어지고 풀어져버렸다. 떨어지면서 허리를 잘못 부딪힌 것인지 허리가 지끈지끈했다. 이런 곳에 구멍을 파놓은 것은 닌자학교 출신의 아야베의 소행이었을 것이나, 빠지는 것은 나의 불운 탓이었다. 앞만 잘 보고 갔어도 되었을 것이다. 하며 자책을 했다. 그나저나 잘 다니지 않는 길목인지라 꺼내줄 사람이 없었다. 큰일났네. 몇번 소리쳤으나, 답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그것도 관두고 지끈대는 허리에 대강 붕대부터 감았다.
어쩌지. 동그란 하늘을 보며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조금씩 잦아들어오는 잠기운에 무기력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가 기지개를 켰다.
조그마한 하늘이 검게 물들고, 흰구름은 별이되었다. 눈을 감으면 감은 눈 위로 조각난 별들이 잔상에 남았다. 그 별들을 하나 둘 세어보다보면 아득한 기억 속의 그가 있다.
*
'붕대 갈아드릴까요?'
조각의 별이 뜨던 밤, 전쟁을 치룬 것인지 피투성이의 그가 나타났다. 붉게 물든 붕대가 안쓰러워 손을 뻗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한쪽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혹여 미열이 도는 건가 싶어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저가 닿는것을 허락치 않았던 그였지만, 그날따라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손이 찬 탓에 온도를 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참을 그의 이마와 내 이마를 번갈아가며 온도를 가늠하려 애썼다.
'믿음직스럽지 못하군.'
곧은 눈빛으로 내가 하는양을 지켜보다가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뻗은 손은 닿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허공에 놓여졌다. 핏빛으로 물들어있던 손은 결국 한참을 눈앞에서 망설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여러모로 닌자다웠다. 기척이 없다는 점과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사사로운 감정에 매달리지 않는 것. 매서운 눈빛.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생각하듯이 나는 닌자답지 못했고, 그와 반대로 그는 누가 보더라도 닌자 같았다.
'붕대 갈아드릴게요.'
그는 눈을 감았다. 팔위로 대충 감아놓은 것이 보이는 붕대를 풀었다. 억겁의 상처가 모습을 드러내고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자잘한 상처들에서 배어나오는 핏물이 팔을 타고 흘렀다. 마른 수건에 물을 조금 적셔 상처를 닦아내고, 그 위로 약초를 빻아 올렸다.
'조금 쓰릴 거에요.'
동실인 토메사부로가 쓰리다고 했던 약초여서 손길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그는 미동하나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케마가 엄살을 부린걸까. 걷은 소매 위로 흐른 땀을 대강 닦아내고 새 붕대를 꺼내 감았다.
그는 매번 저를 찾아왔다. 처음은 붕대를 갈아달라는 것인지 알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제 몸에 손이 닿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럼 혹여 다친 곳이 있느냐 물었다. 그러나 그는 잘다치지 않는다 답했다. 그러면 왜 오는 것이냐는 말에는 답도 하지 않고, 이어 왜 상처를 보여주지 않냐는 물음에는 그리 답했다.
'어린이한테는 무서워서 안돼.'
그 말에 나는 이제 곧 성인이 될 것이라 답했다. 육학년이면 결혼도 한다 투덜이며 덧붙였다. 그가 졸업 후 무엇을 할것이냐 물었다. 전쟁으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러 다닐 것이라 답했다.
그는 내가 닌자답지 않다 답했다. 그리하여 웃었다. 그는 그럴 것 같았다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의 얼굴을 친친 둘러맨 붕대를 풀었다. 두건이 벗겨지고 그를 안듯이 뒤에서 부터 앞으로, 꼼꼼히 감싸져 있던 붕대를 풀어갔다. 그의 숨결이 닿는다. 층층히 쌓여있던 붕대가 풀어지고, 그의 상처가 보였다. 어린애는 무서워해서 안되는데. 그가 감은 눈을 떴다. 양쪽 눈이 호선을 그렸다. 나의 손이 그의 상처에 닿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상처를 어루만졌다.
'하나도 안 무서운거 보니까, 전 어른인가봐요.'
그리고, 그의 입술이 닿았다.
밤의 기척이 들렸다. 풀잎소리가 어우러진 밤의 노래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릴 새도없이 그는 떠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이 너무 깨끗하여, 내가 꿈이라도 꾼 듯 싶었으나, 내 손에 쥐어진 그의 붕대와 입술 위로 남겨진 생경하던 감촉이 꿈이 아님을 증명했다.
아, 그가 흔적을 남겼다.
뒤늦게 밖으로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기척을 감춘 그를 쫓았으나, 눈에는 부서져버린 별들만 담길뿐, 그 무엇도 볼 수 없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추억의 연장선인가 싶어 그 손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의 한쪽 눈이 휘어지는 것을 보았을때야 나는 그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몇년전부터 헛헛하게 오르던 열이 다시금 끓어올랐다. 손에 묻은 흙을 대강털고 머리위로 열을 쟀다. 미열이 있나.
내가 물었다. 어디있었냐구. 그가 다른 답을 했다. 언제나. 그날의 기억이 뒤섞여 두근거리던 입술위로 그가 닿았다.
"나는 널 쫓고 있었어."
그의 손이 머리위로 내려 앉았다. 밤하늘을 보던 그는 또 말없이 사라졌다. 열이 심하게 오르는 듯했다. 밤공기에 오래있던 탓일거다. 내일은 열을 내리는 약초를 구하러 가봐야겠다. 머릿속으론 생각이 엉켰으나, 발걸음은 떼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의 흔적이 남은 입술을 매만졌다.
아, 그가 흔적을 남겼다.
나는 여전히 그의 말마따나 닌자답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말에 의하면 그는,
닌자답지 못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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