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횸정] 의미불명

2016. 2. 1. 10:53

(캐붕주의)


지루하게 흐르는 세상의 굴레속에서 이효민은 하루에도 몇번씩 벽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크고 작은 원들이 방 한 쪽 벽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 삐뚤빼뚤한 곡선을 바라보다가 크레파스를 숨겼고 그러면 이효민은 귀신같이 크레파스를 찾아내 더 커다란 원을 그렸다. 며칠을 의미없는 행동을 반복하다가 어르스름한 새벽에도 꿋꿋이 그림을 그리는 효민을 보며 생각했다. 이야기, 해야겠지.


왜 동그라미를 그리는 거야?


후드를 뒤집어쓴 효민이 경계의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배운대로 웃음을 잃지 않고, 나긋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효민아. 했다.


형 되게 가식적이네요.

응?

눈이 거짓말 치고 있잖아. 눈이.

...

나 같은 새끼한텐 그딴거 안 통하니까- 다른 환자 알아보세요, 형.


빙글빙글 이죽이던 녀석은 마지막 말을 뱉으며 표정을 굳혔고 환자복 상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상담실을 나섰다. 나는 한참을 얼이 빠진 채로 앉아있어야 했다. 한참을 넋을 놓은 채, 애꿎은 볼펜을 휘휘 돌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봤자, 환자야. 그래봤자 정신병자잖아. 신경쓰지말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챠트에 비정상이라는 글씨를 흘겨넣었다.


회진을 돌며 이효민의 방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고 숫자를 천천히 세었다. 차마 돌릴 용기가 안 나 머뭇거리는 와중에 별안간 문고리를 잡은 손 위로 낯선이의 손이 겹쳐지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을 열리고 이효민은 실내화를 직직 끌어가며 벽 앞에 섰다. 제 원들을 훑어보는 듯 했다.


형.

...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궁금해요?


천천히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효민의 얼굴이 악마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봤자, 환자. 그래봤자 정신병자. 


형 비밀을 알려주면, 나도 말할게요.

...

아니면 내가 말할까? 형의 비밀?


자그마한 방에 발을 들여놓고 몸 뒤로 문을 잠궜다. 딸칵이는 소리와 함께 이효민은 소리내 웃었다. 


형은 병이 두려워? 왜? 나같은 취급 받을까봐? 안락한 상담실의자 대신에 이딴 구석진 병실에 먼지가득한 침대를 얻게 될까봐 무서운 거에요?

조용히 해.


킬킬거리면서 다시 벽으로 돌아선 이효민이 벽 가득한 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동그라미를 그리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의사 형. 이효민은 뭉툭하니 짧아진 크레파스 하나를 골랐고, 불퉁한 벽을 따라 큰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원이 생겼다. 색색의 크고 작은 동그라미 위로 검은 선이 가로 질러, 삐뚤빼뚤한 원이 생겼다. 


세상에 완전한 존재는 없어. 어딘가 일그러져 있지.

...

근데 완벽을 꿈꾸는게 뭐가 나빠.

...

안 그래 형?


완벽한 의사가 되기 위해 자신이 나와 같다는 걸 인정 안하는게 뭐가 나빠. 그치? 세상은 순환해, 형.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존나 멋있지 않아요? 의사 소견란에 나는 그렇게 썼다. 알 수없는 행동과 알 수없는 말을 함. 치료의지 부족. 관찰 요망. 너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가 그린 동그라미가 눈 앞에서 핑핑 돌았다. 가장 완전한 도형. 순환하는 삶. 비죽이는 이효민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제서야 방 안의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효민이 물었다. 나랑 함께 완벽을 꿈꿀래요? 미약한 가스냄새가 방안을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되죠?


성큼성큼 다가와 가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고 라이터를 눈 앞에서 흔든다. 하지마, 미친 새끼야. 하지마. 


다음 생이,


재빨리 창문을 열기위해 뛰었고


궁금하지 않아요?


딸깍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효민이 그린 원이 머릿속에서 회전했다. 울퉁불퉁. 이 방에 정상은 없었구나. 그래봤자 환자와, 그래봤자 정신병자. 유리창에 손이 닿기 전, 찰나의 순간 광폭음과 함께 화기가 눈 앞으로 다가왔다. 


아, 세상이 무너지는 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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